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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10.04 버닝(Burning, 이창동 감독, 2018) 영화 리뷰



1.한국에는 기라성같은 명감독들이 많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한명의 감독을 꼽아보라고 한다면,


나는 이 버닝이라는 영화를 보기 이전에도 항상 이창동 감독을 첫번째로 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물론 여기에서 영화를 보는 한명의 관객으로서 심판자라도 된 것마냥 차등의 시선을 두고,


여타의 감독이 그보다 덜 훌륭하다거나 그런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건 아마도 단지 내 성격탓일지도 모르는데,


나는,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색깔에 흡수되거나, 일면적인 주장을 결정해서,


동조를 해줄 사람을 구한다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의 눈치를 피하고 싶어하는 그런 종류의


'비겁함'과 '소심함' 내지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면에 숨어있는 우스꽝스러운 '폭력성'을 지니지 않았다.



오히려 그보다 더욱 조심스러워하고, 끝까지 내 의견을 숨기기에 더욱 미안해하면서도,


그럼에도 단순히 '어느 한 편'의 의견으로서 표출할 수 없는 종류의 말이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그런 성격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창동 감독은 내가 적어도 다분히 내 개인적인 한계로서


마음 편하게 제일의 감독이라고 꼽을 수 있는 것이다.


혹자는 여기서 누가 당신의 성격을 궁금해하겠냐고 따지고 싶겠지만은,


적어도 내가 여기서 위의 여러 볼품없어 보이는 글을 빌어 하고자 하는 말은


그의 영화에는 그런 종류의 '조심스러움'들이 있다는 점이다.




2.그런 점에서 그는 예술가로서 전통적인 덕목을 배워 지니고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그는 항상 예술가처럼 거리를 둔다. 어떤 일면적인 주장에, 어떤 정치색에, 어떤 동조들과 반대들에,


그리고 어떤 규정된 해석들과 영화라는 매체에 대하여, 메세지를 단번에 박아버리려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능성이 있고, 여러 한계가 있으며, 결국엔 그것이 틀릴 것이라는 걸 언제나 서두로 내걸면서도,


소위 '비평적' 해석은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내용에, 연출기법에, 하나의 소품 각각들이 가진 상징적 의미까지도


빌어와서 영화를 하나의 거대한 수수께끼처럼 대하고, 그것을 풀어내려고 노력한다.



그럼에도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리 말할 것이다.


"틀린 것은 알지만, 모두의 해석이 맞은 것이다."


적어도 이런 그들의 태도가 맞다 그르다를 논할 수가 없는 것이,


애초에 문명 이후의 몇천년의 진화과정을 거쳐, 그리고 수십년의 성장과정을 거쳐


DNA든 정신에든 박혀버린 문명적 본능이란 것이 있다면


그런 것일테고, 오히려 그렇기에 예술가는 언제나 그로부터 멀어져서


수수께끼를 내는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게 된다.



영화를 수수께끼로 규정하려는 자들. 관객과 영화 사이에 놓인 더 먼 거리.


그 거리는 관객들이 만드는 것일수도, 오히려 그 덕분에 감독이 만들 수 있는 영화의 특색일수도 있다.


그 거리를 좁혀라. 어떻게든 좁히고, 어떻게든 그 의미를, 그 가치를 찾아내라.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어떤 식으로든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거리는 좁혀지지 않기에 충분히 멋진 거라고 인정되고 있다.


이것은 상투적인 것이며 전통적인 것이다.



어떤 비평가에게 영화라는 매체 그 자체는 어떤 거대한 비밀을 품은 신이 된다.


신인줄 알았던 인간은, 저 먼 거리에서 뒷짐을 진 채로 무수한 해석의 시도들이 낳아대는


의미의 연쇄들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평가하는 자는 보는 자이지만, 예술가는 그 연쇄들을 다시금 위에서 바라본다.


애초에 풀릴 수 없는 수수께끼였고, 사실은 수수께끼가 될 필요도 없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은 비밀인 채로.




3.하지만 그럼에도 이 거리들을 빌미로,


그를 거만한 예술가 내지는 신적인 창조자로 생각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가 다루는 소재들.


그것들은 언제나 슬프고 밑바닥에 있으며 버려지고 찢겨지고 고통받는 것들에 관한 것이다.


그는 결코 그것을 위에서 굽어보지 않는다.



카메라는 그보다도 가격이 싼, 낡아 찢어진 소품들 하나하나 소중하게 담아내고,


비록 그 원본이 아닌 것은 알지만서도, 원본에 닿을 수도 없는 고통의 표정들 하나하나를 담아내고자 한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누구도 그 사람들을 대신해서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버닝의 주제가 '오늘날 젊은이에 관한 영화'라고 했을 때조차,


우리는 그 젊은이들이되어 그들을 대변할 수 없다.



영화의 거리는 이런 곳에서 또 효과를 발휘한다.


당신은 당신이고 나는 나이며, 고통은 고통일 뿐이다.


이것은 영화의 의미가 해결되지 않아 전전긍긍하는 그 고통보다 더욱 전전긍긍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한 순간도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해결되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이라는 말은 단순한 의미해석의 호기심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에 확장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해결을 커녕 그 문제조차 속 시원히 함부로 말할 수 없는데서 나오는 그런 전전긍긍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제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실제를 담아내려고 하고 있고,


그럼에도 이 영화가 찍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은 실제일 수밖엔 없다.


그것은 어떤 본질적이고 운명적인 한계다.


그것은 매체를 떠나 이 세상보다도 더 높은 질서의 한 가지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것을 전전긍긍하게 만드는 그 불쾌함. 그래서 모든 문제가 생긴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기에 그 영화가 찍어내지 못한 실제는 실제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는 것 앞에서 그 전전긍긍.


이것은 여운이라는 말로 남을 것인데, 그것은 어떤 취미(Taste)의 형식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전율이다, 허덕임과 같은 전율이다.





4.그의 영화에서 빌어올 수밖에 없는 문학적 장치들의 사연은, 그래서 두가지 높이로 결정된다.


그 시선은 어떤 시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보다 더욱 하늘 높이 올라있고,


또한 현실의 당사자들보다 더욱 가까이 당사자들을 보지 못해 땅으로 숨어버린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그 어느것도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다.


그럼에도 보지 못 했고, 보지 못 할 것들이 여전히 몸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이다.


그것은 그 기분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고 싶게 하면서도,


결국 그 해결을 못 보기에 모든걸 사라져버리게 하는.


뭔가 만들어내 뜨겁게 아프다가도 이내 타버리는 불과 같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색


오히려 그것을 규정하는 몇몇 단어들에 의하여,


현실의 있는 그대로의 폭력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파격적'이며


또한 정치색이든 어떤 메세지든 분명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단지 그 모든 것을 말하지 않고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그 '괴물', 그것이 어떤 이름이든간에 도대체 거대한 것들, 알 수 없는 것들,


거부할 수 없는 것들이 그 수많은 '나'를 삼키러 왔을 때,


그것을 담아내려고 한 순간, 그 '파격성'은 그것을 못 담아낸 하나의 부끄러움이요,


그 메세지는 도대체 웅성거리기만 할 뿐 닿질 못하는 수수께끼의 답과 같은 것이다.


그의 영화는 언제나 그 앞에 절박하다.




5.따라서 이 영화는 명작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지니고 있다.


죽어버리거나 태워버려서 영화가 끝나버리거나 아니면 글을 끝마치거나.


그 불씨가 사그러들 때, 그 대체 '알 수 없는' 안절부절함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의 불을 벌벌 타오르게 하다가 결국 제 풀에 지쳐 사라져버릴 때.


'2018'이라는 작품 뒤에 박힌 이 세련되어 보이는 년도가 먼 훗날,


낡은 숫자가 되어서 이 불을 다시 일으키는 것조차 두려울 때,


그 때 이 영화는 나한테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Posted by Joshua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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